“나 사랑에 빠졌나봐.”
밥 먹다 말고 툭 내뱉어진 말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낭만적인 성질의 문장은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채 다 해감 되지 못한 조개에서 모래를 뱉어내는 것이나, 목에 걸린 생선가시를 뽑아내는 것과 비슷했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하는 이 남자의 태도가 꼭, 먹을 때까지는 몰랐는데 문득 입에 불편한 게 있어 뱉어보니 그게 모래나 생선가시더라, 같은 투였다는 소리다.
시선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오, 빌어먹을. 한 달에 한 번 있는 가족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실수였다. 이 날은 헤링본 가족사에 있어 대니 헤링본이 실수를 저지른 수많은 날 중 하나로 기억되리라.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것은 아빠의 투덜거림이었다. 그 인간은 자신의 스물셋이나 처먹은 그의 유일한 아들이 한결같이 진지하지도 못하고 바람직하지도 못한 관계-가령 게이 연애-를 맺고 다니는 것에 대해 신물이 난 눈치였다.
“밥 먹다 말고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씨펄, 이놈의 자식은 꼭 아빠가 중요한 말을 할 때마다 끼어들어서 산통을 다 깨놓는다니까, 옘병! 그가 덧붙였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다음 미드필더로 누구를 선발할지에 대해 피를 토할 것처럼 열렬하게 논하고 있던 참이었다.
엄마의 반응은 조금 더 그럴싸했다.
“여자니? 돈은 많아? 직업은 뭐라니?”
그녀는 관심도 없는 다른 나라의 미드필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친아들의 연애 사정이 훨씬 흥미진진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최근 몇 년간 장성한 딸과 아들을 시집 장가보내는 것을 숙원사업으로 삼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아들이 남자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언젠가 그런 장난을 멈추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 젊은 애들 보면 동성애도 좀 하고, 그렇게 방황하고 그러는 거지. 그녀는 이런 논조로 이웃들에게 그녀의 아들이 사실은 좀 특이한 비행을 하고 있을 뿐임을 강조하곤 했다. 물론 개소리였다.
흡사 청문회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나, 대니 헤링본의 유일한 누이인 브리짓이었다. 그녀의 하나 뿐인 동생이 다른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대답 대신 으깬 감자를 더욱 으깨는데 여념이 없었던 탓이다.
“엄마는. 저 자식이 여자랑 연애하는 거 봤어요? 돈은 많겠지. 쟤 돈 많은 남자만 만나잖아.”
나이도 많을 테고. 직업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익힌 토마토를 포크로 집으며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지껄였다. 그러나 은근하게 던지는 눈길에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대니 헤링본의 애인은 여태껏 없었기 때문이다. 애당초에 애인이 아니었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자, 이제 대니 헤링본이 다시 입을 열 차례였다. 얼굴에는 마치 중대 사항을 발표하는 국가 원수의 그것과 같은 진지함이 어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축축해진 입술을 뗐다.
“...말론 브란도가...”
말론 브란도?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말론 브란도가 내 엉덩이만 홀랑 먹고 도망가 버렸어.”
자기 뒤도 쑤시게 해주겠다고 해놓고선 말이야! 나는 씩씩거리며 포크로 완두콩을 짓이겼다. 누나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에 빠졌노라고 고백하는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참신한 개소리였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말론 브란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
비스포크의 별장에 처음 발을 들였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서른 남짓의 사람들이 북적이는 큰 별장 로비에서 다양한 색을 가진 신사와 재단사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큰 창 너머로 내리쬐는 햇볕과 적당히 건조한 공기. 맛있는 음식과 와인이 풍족하게 구비된 곳의 잘생긴 중년신사들. 생전 처음 고급 뷔페에 갔을 때도 이정도로 신이 나지는 않았더랬다. 비스포크의 회장인 카말리아는 대놓고 ‘비밀스런 방’이 있음을 공표했고, 그 말인 즉, 원하는 상대와 마음껏 뒹굴어도 괜찮다는 걸 의미했다. 귀하신 분들을 위한 방탕한 파티인 셈이지. 주문도 받고 떡도 치고. 운이 좋으면 괜찮은 단골 고객이나 후원자를 건지게 될 지도 몰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과 예술가들의 관계가 그러했듯이, 이 다니엘 헤링본도 그럴싸한 봉을 잡아 세계에 이름을 떨칠 기회를 잡는다면 그 얼마나 괜찮은 일인가.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가재 잡고 도랑도 친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소리였다.
이 흑심 가득한 하이에나 같은 남자가, 사람들과 정중한 인사를 나누고 있던 파비오 그로소에게 선뜻 다가가 “나도 악수 좀 해 주십쇼, 고객님!”하고 말을 걸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체 이 남자는 뭘까?
식상하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당신의 스타일이 꽤 근사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은 파티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옷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대체로 클래식한 디자인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으레 당신 또래의 남자들이 섣불리 저지르곤 하는 실수처럼 칙칙하거나 우중충하지 않고 도리어 세련된 인상을 줬다. 내 취향대로라면 좀 더 화려하고 딱 달라붙는 옷을 입혔겠지만, 노치트 라펠을 고집하는 당신에게는 그런 옷들이 더 어울려보였다.
다만 겨울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날씨가 따뜻한 축에 속하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굳이 코트를 망토처럼 휘날리는 까닭이 궁금하기는 했다. 꼭, 무슨 실력행사깨나 하는 마피아 보스 같지 않은가. 아니면 강력계 형사거나. 당신의 오른쪽 눈썹 위에 있는 흉터는 그런 편견을 더 강화하기에 충분했다. 당신이 은근슬쩍 떠보았을 때 당신이 그렇노라 이야기하는 것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은 그런 강렬한 인상 탓이었다.
그러면서도 옅은 회색 머리칼과 연하늘색 눈만큼은 부드러웠다. 모든 것을 관망하는 듯한 느긋한 태도. 당신의 말과 행동에는 작고 어린 것들을 대하는 큰짐승들의 배려, 혹은 관대함 같은 것이 묻어났다.
그게 도리어 오기를 불러 일으켰다. 당신이 오랜 시간 쌓아 올렸을 가면의 이면에 대체 뭐가 숨어 있을지 궁금했다. 공들여 세운 탑이 무너트리기를 좋아하는 건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악취미중 하나였다.
당신의 얼굴에 으레 감도는 느긋한 미소 대신, 당혹감 혹은 분노 같은 감정들이 물드는 것이 보고 싶어졌다.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디밀었던 것은 그런, 어린애들 특유의 무모한 호기심과 도전 정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대니, 이 멍청한 자식아. 수틀리면 너는 시칠리아 앞바다에 던져질지도 몰라!
이성을 관장하는 내 안의 다른 대니가 나를 설득하고자 애를 쓰기는 했다. 그러나 본디 대니 헤링본이라는 남자는 충동 속에 태어나 충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불가능했다는 소리다.
당신의 뒷구멍을 따먹으려다가 도리어 뒷구멍이 따일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쩌면 조금 더 신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한들 다 무슨 소용이랴.
***
당신과 뒹굴고 난 다음날 온몸이 얼얼했다. 십대 어린애들도 아니면서 난투를 벌여가며 떡을 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깊숙이 목구멍까지 파고들었던 당신의 성기는 지나치게 크고, 굵고, 길었다. 당신의 손 크기를 보고 가늠을 했어야했는데, 그때는 당신의 엉덩이를 노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이런 정중하지만 난폭한 침입자의 침범에 연약한 대니 헤링본의 목이 잔뜩 쉬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젠가 위 내시경을 생으로 받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얼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엄살 아닌 엄살을 피운 대가로 어린이용 캔디 영양제 정도는 받을 수 있었는데.
엉덩이는 또 어떻고. 그 흉악스런 물건은 내 뒷구멍을 온통 들쑤시고 간 덕분에 하룻밤이 지나고 났음에도 구멍이 벌어져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 크고 굵직한 물건이 내 뒷구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글쎄,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오랜 시간 묶여 있었던 팔은 얼얼했고, 넓게 벌려진 채 가슴팍까지 올라붙었던 허벅지 근육은 말도 못하게 당겼다. 운동을 조금만 더 게을리 했더라면 아마 제대로 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엉덩이가 따먹힐 줄 알았으면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굴었을 것이다.
분했다. 자존심 상했다. 뒤가 따였다는 사실보다는, 당신이 일 때문에 내가 당신의 뒤를 따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랬다. 세상만사는 기브 앤 테이크로 돌아가야 하는 법인데, 당신의 그 잘난 엉덩이를 만져만 보고 내 자랑스런 다니엘 기간틱매그넘 헤링본 주니어로 쑤시지 못했다는 게 못내 억울했다. 통화 내용이 어쩐지 매우 진지해보여 제대로 항의조차 못했던 더 그랬다.
알량한 커플 게임 같은 걸 하자는 비스포크 회장의 유치한 제안에 응한 건 순전히 이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과 하루 동안의 연인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뇌물은 없는 청탁을 한 셈이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이 게임은 처음부터 정당하게 시작된 게 아니었다. 나는 당신에게 접근할 빌미가 필요했다. 하루 동안 연인 행세를 하다보면 연애 놀이도 하고, 섹스도 하고, 또 그러다보면 당신 뒤를 쑤실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당신에게 다가가, 마치 어쩔 수 없이 이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우리더러 연애놀이나 하라는군요, 파파.”하고.
당신은 원하는 상대가 있었는데 치여서 예까지 왔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당신이 바로 내가 원하는 상대였다.
***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사실 같이 수영을 하자고 했던 것은 지난 번 당신과 섹스 했을 적에 당신의 알몸을 다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제안한 거였다. 음탕한 어린놈이래도 별로 할 말은 없다. 나는 그저 섹스라면 환장하는 음탕한 어린놈이 맞으니까. 지금도 나는 그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순전히, 밝은 조명 아래 당신의 근사한 등짝과 엉덩이, 그리고 언젠가 나를 괴롭혔던 훌륭한 거시기를 맨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은 어두웠고, 아무도 없는 수영장은 고요했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적당한 조명은 잔잔했고, 실내 온도는 맨몸으로 있기에도 춥지 않고 딱 좋았다. 적당히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적당히 즐거운 섹스를 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그런데 젠장, 기껏 기회를 만들어놓았더니 한다는 것이 호구처럼 물장난이나 치다가 당신의 방에서 당신을 부둥켜안고 곯아떨어져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전혀 대니 헤링본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 왜 그랬을까? 대니 헤링본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니 호구 헤링본, 이 멍청한 새끼야. 차려진 밥상을 두고 못 받아 처먹는 건 어디의 관습이냔 말이냐.’
그러자 다른 대니 헤링본이 대답했다.
‘오, 이 씨팔놈아. 대가리가 있거든 그 전날에 했던 섹스를 생각해보라고! 너는 이미 존나 피곤한 상태였고 거기다가 건장한 남자랑 물놀이까지 했으니 피곤해 뒤질 지경이지 않았겠냐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남자의 거시기를 쥘 힘도 없었냐! 포크 들 힘만 있어도 거시기를 세우는 게 대니 헤링본인데!’
‘그...그렇지만 무드를 망치잖아!’
‘무드?’
‘그래! 무드!’
그래, 사람들이 들으면 기함할만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다니엘 헤링본은 무드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드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이 상스런 남자가 뭔 놈의 무드를 찾느냐고 하면 별로 해줄 말이 없다. 그냥, 그걸 깨선 안될 것만 같았고, 그래서 마치 정말로, 당신의 다정한 연인인 양 달콤하게 굴었을 뿐이다.
차가운 물속에서 당신과 끌어안고 있는 게 좋았고, 당신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게 좋았다. 심지어는 당신이 내 수영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 마저도 좋았다. 변태 같지만 사실이 그러한 걸 어쩌나.
당신은 내게 여기 와서 어떤 예측하지 못할 경험들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마피아 보스를 만난 것, 그를 후원자로 두게 된 것, 그 사람과 떡을 치고 수영을 한 것을 꼽았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이정도로 구체적이진 않았을 테지만 예측할 수 있을 만한 범주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건,
내 계획에는 전혀 없는 거였다.
***
“그래서, 그 남자는 대체 누군데?”
누나가 물었다. 가족 모임이 있고서 꼭 일주일 후였다. 누나는 독한 매니큐어로 패디큐어를 바르고 있었는데, 그 냄새가 지독해서 온 창문을 다 열어놓아야 만했다.
“브리즈번으로 얼른 꺼지지 않고 왜 내 집에서 이 지랄이야?”
이 자식 누나한테 말본새 좀 보게? 그녀의 매서운 발길질이 등 위로 쏟아졌다. 아, 아야! 하여간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이란 스테레오 타입은 죄다 깨놓는 여자였다. 얼얼한 등짝을 두 팔로 감싸며 불만스레 입술을 비죽이고 있으려니 그녀가 다시 물어왔다. 그 남자 누구냐고.
“아 몰라, 존나 잘생겼다, 됐냐?”
“그야 그렇겠지. 너 얼굴 되게 보잖아. 몇 살인데, 그 사람?”
그러고 보니 나이도 몰랐다. 어디 사는 지도 몰랐다.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막연하게, 이탈리아 남부 출신이라는 것, 키가 나보다는 10센티 정도 더 크고 체격이 좋다는 것, 몸에 흉터가 많지만 얼굴은 비교적 깨끗하고, 시린 연하늘색 눈이 좀 다정하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신에게 연락할 전화번호 정도야 받아왔다지만 그리로 차마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 참, 천하의 다니엘 헤링본이 말이다. 당신에게 나는 하고 많은 후원자 중 하나일 뿐일 테니까.
소심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이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당신은 나도 모르는 새 내게 기울어져 온통 나를 들쑤셔 놓았으면서, 당신에게는 내가 별 특별한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니 화가 났다. 이건 불공평했다. 차라리 찾아가서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당신은 그런 게 통할만 한 사람도 아니었다.
“나이도 몰라.”
어디사는지도 모르고. 짧게 덧붙였다. 누나가 박장대소했다. 그 의기양양하던 대니 헤링본이 풀 죽은 개처럼 꼬리를 말고 끙끙거리는 꼴이 우스웠던 게다. 그녀는 한참이나 얄밉게 깔깔거리다가, 내 어깨에 큼지막한 발을 얹고서는 다 바른 패디큐어들을 말렸다. 그 위로 입 바람을 불며 그녀가 말했다.
“등신아, 너는 사랑이 무섭지?”
“뭐라는 거야, 이 여자가.”
“무섭잖아. 실패할까봐.”
“안 무서워, 이년아!”
“구라치지마, 새끼야.”
그녀가 다른 쪽 발로 내 등을 다시 뻥 걷어찼다. 빌어먹을, 정말로 아팠다. 내가 등이 아파 몸을 움츠리거나 말거나, 그녀는 그 대단하신 입을 잘도 조잘거리며 내게 훈계했다.
“겁 대가리 상실한 다니엘 헤링본은 어디 갔니? 자지는 그렇게나 휘두르고 다니면서.”
“야, 그거랑, 이거랑 같냐?”
“왜 다르냐? 너는 임마, 엉덩이 열어줄 상대 봐가며 껄떡거리니? 내가 아는 한 아니었는데.”
“계집애가 못하는 말이 없네!”
“지랄, 언제부터 니가 날 여자 취급했다고. 아무튼, 네놈의 그 빌어먹을 아들래미 반만큼만 좀 솔직해져보라고. 너 혼자 여기서 끙끙 앓으면 그 사람이 알아줄 것 같니? 네가 정말 좋으면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가란 말이야. 호구처럼 여기서 낑낑거리지 말고.”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이 너는 별로 취향이 아니라면 질척하게 굴 거 없이 딱 마음 접으란 말이야. 얼마나 심플해. 그녀가 덧붙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한 말은 정말 사랑에 관한 일반론적인 말들의 나열이었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당신에게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직도 좀 헷갈리던 터였다. 사랑이라기엔 집착 같았고, 집착이라기엔 달콤했고, 또 마냥 달콤하다 보기에는 쓰고 아팠다.
고작 일주일 동안의 당신을 알아놓고서 이러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고작 일주일 본 상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걔네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미성년자였고, 나는 그보다는 나이가 좀 더 많았다. 스물 셋. 아직 꿈 많을 나이라고들 하지만 어쨌든 산타 할아버지는 믿지 않는 나이였고, 그런 뻔한 사랑론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에는 좀 늙은 나이였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무슨 놈의 사랑이냔 말이다.
***
고민의 시간은 밑도 끝도 없이 길어졌다. 나는 로미오와 나의 처지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로미오는 줄리엣이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내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뾰족하게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뭐라고 입을 댄단 말인가. 파비오, 당신의 뒷구멍을 아직 따먹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따먹으러 가겠습니다, 하고? 아니면, 당신의 자지가 내 구멍을 파고든 순간,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따금씩 계좌로 흘러드는 콜레오 재단 명의의 돈을 확인할 때마다 당신이 아직도 살아있고, 나를 잊지는 않았음을 확인했다. 머릿속에 당신 생각이 당최 꺼지지가 않아서 재단 일에 더 매달렸다. 당신이 재단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위인이었더라면 이 방식은 당신을 잊는데 아주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허나 당신은 그마저도 좋아했지.
한동안 노치트 라펠은 일부러 피했다. 당신이 입었던 클래식한 디자인의 슈트는 일절 다른 재단사에게로 넘겼다.
명분은 좋았다.
‘이보십쇼, 나는 미래지향적인 디자이너니까, 조상님들이나 입던 그런 구닥다리 같은 건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선배한테 뒤지게 혼났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고객이 오면 자리를 피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멜빵을 메거나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온 고객만 보면 경기를 일으켰다. 노치트 라펠에서 시작된 편집증적인 거부감이 세미노치트 라펠에서 세미피크트 라펠, 그리고 피크트 라펠까지 번진 것은 삽시간의 일이었다.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선임 재단사가 내게 말했다. 껄렁하고 껄떡거리고 다니기는 해도 실력만큼은 멀쩡하던 놈이 갑자기 이 사단이 나니 걱정스러워진 모양이었다.
“내가 뭐요, 나 완전 멀쩡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하자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새낀 언제 철이 드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웬 봉투 하나를 내미는데, 봉투 오른쪽 아래에 ‘다니엘 헤링본 귀하’라는 고풍스러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발신인은 ‘콜레오 재단’, 안에 든 건 화이트 밀라노 초대권과 왕복 비행기 표 두 장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대가리가 멀쩡한 놈이라면 이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
안다. 이건 순전히 내 집착이다. 필름 누아르의 삶을 사는 당신의 세계는 하이틴 시트콤의 세계를 사는 나와는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과 나의 세계 사이의 어떤 공통점을 찾고 있었다. 내가 당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그 어느 중간쯤에서, ‘마이페어레이디’나 ‘귀여운 여인’ 쯤은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서.
패기 넘치는 대니. 리틀 대니. 놀리는 어투 속에는 흔히 아버지들이 아들들에게 가지는 관용 같은 게 녹아있었다. 그건 말하자면 애정의 한 종류이기는 했지만 내가 당신에게 품은 종류의 것과 같으리라곤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신의 가면 너머의 얼굴이 궁금해짐과 동시에, 알기 두려워진 건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만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당신에게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로 너무나 기울어버려서 쏟아져 내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 빌어먹을, 조금은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사실, 밀라노는 아무래도 좋았다. 패션쇼 같은 건 언제든지 올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건, 순전히 혹시라도 당신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밀라노의 휴일’
내가 오드리 햅번이 아니고 당신이 그레고리 펙이 아니건만 나는 오늘의 제목을 ‘로마의 휴일’에서 따온 것을 조금 후회했다. 당신과 보낸 하루가 그저 해프닝으로 남는 것이 싫었던 까닭이다.
스위트룸의 큼지막한 유리창 너머로는 레이스로 수놓아 만든 듯한 두오모 성당과 갈레리아의 유리천장이 보였다. 그 사이에는 당신과 탔던 노란 트램이 이따금씩 지나쳤다. 밤이 늦었건만 아직도 밖에는 많은 관광객들. 저 사이를 거닐었던 것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굳이 샴페인을 찾은 건, 멋진 야경을 기념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당신의 엉덩이를 드디어 따먹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축배를 올리기 위함도 아니었음을 당신도 이 쯤 되면 알아차릴지도 모르겠다.
갈레리아의 흰 소.
당신은 그 위를 돌며 앞으로 주어질 삶에 대해 빌었다고 했다. 그 삶 속에 나도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푸스스 터져 나오는 웃음 사이로 실없는 농담이 터져 나왔다. 어색함을 감추고 싶어서였다. 대니 헤링본과 무거운 분위기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자넨, 무슨 소원을 빌었나? 대충 상상은 가네만.”
이어지는 당신의 물음.
오, 순진한 시뇨레. 대답을 들으면 당신은 당황할 것이 틀림없을 텐데.
당신의 물음에 대답하기까지 조금의 뜸을 들인 건, 이제부터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은 당신에게 당혹감을 안겨줄 게 틀림없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오, 시뇨레.”
차마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채 당신의 손목을 잡은 손을 꿈지럭거린다. 이런 낯간지러운 상황은 아무리 있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나는 당신에게 고백할 용기를 달라고 빌었습니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다.
미안합니다, 파파. 이런 느끼한 상황은 나도 참 싫은데 이게 어쩔 수가 없네요. 나직한 뒷말을 입안에서 웅얼거린다.
아직 당신을 안지도 못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좋아져버린걸 어떡해.